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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1_겨울_논문_노동은 어떻게 가치가 되는가?(2)_위진철 등록일 2021.11.07 17:40
글쓴이 관리자 조회 406

여기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추상화에 내재하는 자본의 주도성이 (변증법적 관계의 맥락이나 구조의 맥락에서 벗어나) 자본의 절대적 자율성이나 선험적 주체성으로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아서 논의의 핵심이다. , 잠시 이를 토니 스미스의 주장을 빌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토니 스미스는 나폴레오니에 대한 아서의 비판과 유사한 관점에서 자본을 지배적 주체’(dominant subject)이자 유사 주체’(pseudo subject)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궁극적 목적이 화폐와의 교환을 통해 가치를 승인받는 데 있기 때문에 상품과 화폐 같은 소외된 가치 형태가 인간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본은 소외된 노동을 전유하면서 그 자신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발생시키는 (또는 자기 재생산하는) ‘지배적 주체가 된다. 그러나 산 노동이 가치증식의 조건이 되는 한 자본은 노동에 기생하는 유사주체이기도 하다. 스미스는 이 모순은 일반화된 상품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 그 자체이며, 두 가지 규정 가운데 어느 하나만 강조할 경우 자본이 강제하는 가치증식의 명령이 상대화되거나, 반대로 자본의 힘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아래서 본격적으로 아서의 나폴레오니 비판을 살펴보자.

 

나폴레오니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이 발생하면서 현실적으로 생산적인 것은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노동가치이론이 파산했다는 입장을 제시한 바 있다. 아서가 노동이 가치가 되는 과정을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나폴레오니 역시 추상노동을 생산에서의 착취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보면서 가치를 자본의 특수한 산물”(Napoleoni, 1991: 226)로 이론화한다. 나폴레오니가 가치를 자본의 특수한 산물로 규정하는 이유는 노동의 실질적 포섭 과정에서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생산력으로 전화되는 현실적 전도(inversion)’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추상노동으로서 그것의 역량 속에서 생산적 노동자의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의 속성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관계가 전도되는데, 노동은 노동자를 술어로 갖는 주어가 된다. 이러한 종류의 분리(separation)는 자본이 생산의 기술적 내용을 그 자체와 동질적으로 만드는 생산 상황(예컨대, 생산이 기계와 대공업에 지배될 때)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생산수단은 더 이상 그것들이 원래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노동을 상호매개 하지 않는다. 대신에 노동자에게 외재적인 지식과 조직적 역량을 흡수하면서 생산의 시작점이 되고 노동은 도구와 자연의 매개 고리 수준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과학(지식)의 도구로의 흡수가 또한 바로 그 과학이 노동자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Napoleoni, 1991: 224).

 

마르크스 역시도 자본』Ⅲ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가 있다. “생산과정 그 자체에서 주체와 객체의 전도가 발생한다. 모든 노동의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난다.”(Marx, : ) , 나폴레오니의 가치론 비판은, 실질적 포섭의 결과로 노동자가 탈숙련화되면서 기계의 의식 있는 기관”(마르크스)이 된 이상 가치를 실제로 생산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노동가치론에 근거해서 자본가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종별성을 설명하려는 실험은 실패했으며 소외이론(theory of alienation)과 같은 마르크스의 철학(혹은 인간학)에 의지해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한다는 결론에 귀착한다(Napoleoni, 1991: 230).

이처럼 자본관계에서 노동의 추상화가 이루어진다는 발상을 공유하는 아서의 해석 역시 노동가치이론과 착취이론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혹은 다른 각도에서 질문하자면, 자본 형태가 기계를 도입하고 생산적 노동을 내부화하는 순간은 모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생산력으로 전도됨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나폴레오니의 이론적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아서에게, 나폴레오니의 해석은 변증법적 모순을 적합하게 파악하지 못하면서 절반의 진실만을 다루고 있다. 달리 말해서,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생산력으로 전도되는 과정은 현실적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이 전도의 결과로 자본이 모순 없는 지배적 주체가 된 것은 아니다. 아서에 따르면, 나폴레오니가 생산력을 자본의 속성으로만 파악한 것과 달리, 노동이 생산적이라는 사실과 자본이 생산적이라는 사실 모두 진실이다. 이는 이론의 모순(결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본질상 모순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Arthur, 2004: 51). 이 본질적 모순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생산과정에서 실제로 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은 노동자이며 이 생산 노동이 가치 형태와 자본의 기저에 존재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가치의 실체로서 추상노동은 가치 형태의 발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 형태의 발전(자기증식하는 가치로서 자본) 결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자본은 생산의 실질적 주체이며, 그 축적을 향한 충동 속에서 반드시 노동과 기계에 관계되어야 하며, 그것들[노동과 기계] 안에서 스스로를 매개해야만 한다(Arthur, 2004: 50).

여기서 아서는 이것이 전도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 역설적으로 생산과정은 가치 형태가 노동을 지배하는 과정으로서 생산된 사물들(가치형태)이 생산한 주체(노동자)를 지배하면서 발생하는 소외를 발생시킨다.

 

노동(주체)과 노동의 객관적인 사회적 표현(객체)은 전도되고, 그에 따라 사회적 형태 그 자체가 자율적(autonomous)인 것이 된다. 노동 소외와 자본에 의한 실질적 포섭의 결과로 생산의 조정(措定, positing)의 객체성이 자율화되고 노동과정을 그것[자본]진리로서 돌이켜본다.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의 객관적 사회적 표현에 불과한 존재가 노동에 대한 지배를 획득한다. 즉 노동이 자본축적의 자원으로 환원된다. 이 본질적 모순은 본질에 대한 긍정이 부인의 방식(mode of denial)으로 외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동의 객체화는 그것의 수탈(expropriation), 즉 그것이 자본의 한 계기로서 설정되는 것과 일치한다. 반면에 자본의 주체화는 살아 있는 노동의 활동에 대한 의존으로서 나타난다. 이 진단은 왜 동일한 생산력이 두 번 계산되는지 설명해준다. 가치 형태에 내재한 존재론적 전도는 생산이 평범한 물질적 현실성과 함께 이상적(ideal) 현실성을 획득하게 됨을 의미한다(Arthur, 2004: 52).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은 현실적 규정력을 지니고 노동을 가치증식의 수단으로서 지배/소외한다. 그러나 이 전도의 과정이 자본의 본질적 모순을 보여주는 이유는 노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이 가치증식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묘사하는 주인과 노예의 투쟁처럼 자본은 노동을 지배하지만 노동이 없다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아서는 그 이유를 자본이 기계의 도입을 통해 노동의 구체성을 사상하고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부품처럼 전화시키고자 하지만 노동의 주체성’(subjecticity)을 완전히 박탈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Arthur, 2004: 52).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존재론적 모순(계급투쟁)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노동의 객관적 표현(가치형태)에 지배되는 소외에 저항하고 자본가들은 (잉여)노동을 (잉여)가치로 전화하고자 한다.

 

자본이 이러한 관점에서 헤게모니적이지만, 자본의 노동 포섭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노동이 항상 자본의 에 있으면서 자본에 반하기때문이다. 이것이 나폴레오니가 생산력을 자본의 결과로 돌리면서 간과한 것이다. 생산과정이 자본에 의한 실질적 포섭이라고 하더라도 자본의 문제는 그것이 노동의 행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노동자를 기계나 의지가 박살난 동물처럼 단순한 생산 도구의 지위로 축소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소외라는 목표를 향해 의지를 꺾는 것이다. 여전히 문제는 노동자의 행동을 조작하는 것이지 그들의 모든 주체성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억압된 노동자들의 주체성은 자본의 목표에 대한 위협으로 남아 있다.(Arthur, 2004: 51)

 

따라서 나폴레오니가 주장하듯이 전도의 결과로 노동의 생산성이 자본의 생산성으로 전화되었지만, 자본이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 자본은 여전히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아서는 이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가치가 노동에 의해 생산되지만, 단 자본의 실질적 포섭(계급투쟁)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변증법적 모순으로서 해석한다. 이는 노동과 가치의 관계를 변증법적 관계로 이해한다면 노동가치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가치로 전화되는 과정은 직접적 과정이 아니라 자본을 매개로 한 과정이다. 예컨대, 노동력을 지출해서 무언가를 생산하더라도 그것이 잉여가치(이윤) 생산에 통합되어 있지 않다면 이 노동은 가치로 전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서는 가치를 재화를 생산하는 데 성공한 노동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노동을 그것으로부터 소외시키면서 상품을 생산한 자본의 성공에 대한 인정이라고 재규정하면서, 동시에 생산적 노동 역시 반생산적 노동’(counterproductive labour)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앞서 살펴본 나폴레오니가 주장하듯이 마르크스의 착취이론이 계급사회 일반의 착취(“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위해 생산한다”)를 비판하는 이론이 한정될 수 없음을 함의한다. 반대로 자본 역시 계급투쟁을 통해 착취에 저항하는 산 노동을 사물화하지 못한다면 잉여가치의 획득이 불가능하다는 자본주의의 종별적 모순을 사고할 때 노동가치이론의 과학성을 정확하게 이론화할 수 있다. 따라서 아서는 노동가치론에서 노동과 가치의 관계를 부정성’(negativity)의 관계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치는 재화를 생산하는 데 성공한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아니라 노동을 그 자신에 대해 소외시키면서, 즉 노동일 동안 반생산적 노동’(counterproductive labour)을 착취하면서 상품을 생산한 자본의 성공이다. 분명히 노동과 가치를 뒤섞는 어떤 이론이라도 그것들의 관계를 완전히 실증적(positive) 의미로 사고한다. 노동지출(labouring) 활동은 직접적으로 가치 흐름과 일치한다. 그러나 수탈된 노동은 정확히는 가치의 실질적 내용이다. 특수한 자본주의적 노동 착취가 발생하는 것은 가치 형태 아래서이다. 즉 가치는 그것의 실체로서 부정되면서 동시에 보유되는(‘죽은 노동’)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변증법적 극복(‘지양’, sublation)에 의해 구성된다(Arthur, 2004: 55).

 

이와 같은 관점에서 아서는 가치 크기를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대신 사회적 필요 착취 시간’(socially necessary exploitation time)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가치가 착취된/소외된 노동의 사물화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변증법적 관계에 충실하게 노동가치이론을 재구성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치는 단순히 물리적 노동과정이나 기술적 과정의 결과로 파악될 수 없고 생산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계급투쟁과 부가 추상적 형태(가치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특수성을 통해서만 적합하게 사고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아서는 가치의 실체가 되는 산 노동은 노동의 사물화 또는 (잉여) 노동의 (잉여) 가치로의 전화에 저항하는 반생산적(counterproductive) 노동이라고 규정한다. 요컨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이윤의 형성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가치법칙을 작동시키는 힘인 것이다.


3) 이 지점에서 순행은 가설-연역의 방법과 명확하게 구분된다

4) Smith(2017), pp. 103-130.

5) 아서는 착취(계급투쟁)를 생산된 가치가 필요노동/잉여노동으로 분할되는 분배과정에서 발생하기 이전에 생산 그 자체에서 이미 발생하는 것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 간 경쟁을 통해서 가치가 분배되기 이전에 이미 생산에서의 계급투쟁을 통해 가치가 형성되는 추상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함의한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아서의 계급투쟁 개념은 자본주의 존재론적 구성요소”(p. 57)이지 인격적 쟁투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참고문헌


Arthur, Christopher. 2004. New Dialectics and Marx’s Capital.

Bidet, Jacques. 2005. “The Dialectician’s interpretation of Capital”

Callinicos, Alex. 2003. “Against ‘New Dialectics’”

Cohen, G. A. 1979. “The labor theory of value and the concept of exploitation”. The Value Controversy. Verso.

Kincaid, Jim. 2008. The New Dialectic. Critical Companion to Contemporary Marxim.

Marx, Karl. 1993. Grundrisse: Foundations of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Murray, Patrick. 2014. “How Hegel Helped Marx to Overturn Ricardo’s Theory of Profit”. Marx’s Capital and Hegel’s Logic.

Napoleoni, Calude. 1991. “Value and exploitation: marx’s economic theory and beyond”.

Rubin. I. I. 1979. Essays on Marx’s Theory of Va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