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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1_겨울_논문_노동은 어떻게 가치가 되는가?(1)_위진철 등록일 2021.11.07 17:34
글쓴이 관리자 조회 461

노동은 어떻게 가치가 되는가

 

위진철(사과나무 연구위원)

 

이 글은 크리스토퍼 J. 아서(C. J. Arthur)의 노동가치이론 재해석을 중심으로 노동(Labour)과 가치(Value)의 관계를 설명하고, 노동가치이론과 관련한 이후의 논점들을 제기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먼저 변증법에 대한 아서의 입장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발전시킨 노동가치이론 재해석의 문제들을 다뤄볼 것이다.

아서는 이른바 신변증법(New Dialectics)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비목적론적인 형태로 가공하고 이에 준거하여 노동가치이론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아서는 헤겔(G. Hegel)의 변증법, 특히 논리학(Science of Logic)자본(Capital) 그룬트리세(Grundrisse)에 내장된 마르크스(K. Marx)의 변증법 사이의 동형성(homology)을 강조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 아서가 보기에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제시했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심원한 영향을 받은 산물이다. 그리고 이 헤겔과 마르크스 사이의 연속성을 포착할 때 자본을 역사 일반의 초역사적 논리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역사적으로 종별적인 생산양식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아서의 주장의 요체이다. 이는 기존에 알튀세르(L. Althusser)나 마슈레(P. Macherey)와 같이 비목적론적 변증법을 가공한다는 목적을 공유하는 이론가들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이 헤겔 변증법의 잔재로 인해 역사를 단일한 모순의 발전으로 설명하게 되었다고 비판하는 것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전략이기도 하다. 앞선 이론가들이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헤겔의 변증법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과 달리, 아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양자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방어하고자 한다. 두 이론적 흐름이 모두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방어하고자 하면서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주장하는 변증법 해석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적합하게 파악하는 것은 변증법뿐만 아니라 변증법을 바탕으로 하는 이론(노동가치이론)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 알튀세르의 논의는 많은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아서의 변증법 해석에 집중하면서 변증법과 현실, 과학, 이론의 관계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아서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이 단순히 철학적 공간에서 작동하는 논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현실성 속에서 작동하는 논리(노동가치이론)라고 주장하는데, (헤겔 변증법의 전도를 주장했던 마르크스 자신의 주장과 달리)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헤겔의 변증법과의 연속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논점이 될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

 

아서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내재하는 적합한 변증법 모델을 체계 변증법’(systematic dialectic)으로 정식화한다. 체계 변증법은 이론적 방법이자 존재의 원리 모두를 함의한다. 이론적 방법으로서 체계 변증법은 실존하는 구체적 전체(whole)를 개념화하기 위해 설계된 범주들의 접합”(Arthur, 2004: 4) 방법을 의미한다. , 이론적 범주들의 전개 및 구성 방법이 체계 변증법의 한 차원을 규정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의 존재론적 차원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현실적 기제(mechanism)를 함의한다. 자본이 변증법을 자신의 과학적 논리로 채택한 이유는 과학은 연구 대상의 특유한 성질에 적절한 논리를 채택해야 하는데 물질적인 것의 운동 그 자체가 그러한[변증법적] 논리적 범주들을 통해 표현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Arthur, 2004: 3, 79). 이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체계 변증법의 핵심은 총체성에 배태된 형태와 관계들을 표현하는 일련의 범주들(계기들)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전체(whole)를 재구성한다는 데 있다. 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범주들을 발전시켜 나간 결과로 이론 체계 전체를 재구성하게 되고, 이 재구성된 전체에 입각하여 앞선 범주들의 의미를 다시 파악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아서는 이를 순행(progression)과 역행(retrogression)의 논리로 정리하고 있다. 순행은 뒤따르는 범주들이 앞선 범주들의 모순(결함)을 해소하면서 발전한다는 서술 방법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범주들을 배치하는 것을 의미한다(Arthur, 2004: 65~66). 범주들의 순행 배치 과정에서 앞선 범주들이 보다 단순하고 추상적이라면 뒤따르는 범주들은 보다 복잡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예컨대, 자본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범주인 상품(Commodity)은 교환가능성이라는 특질을 지니고 있지만, 상품의 교환가능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상이한 상품들을 일정한 양과 크기로서 추상화할 수 있는 일반등가물(general equivalent)을 필요로 한다. 이로 인해 일반등가물로서 화폐(Money) 범주가 출현한다.

다른 한편, 아서는 역행의 논리를 변증법적 논리로서 특히 강조한다. 역행의 논리는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간 이후에, 가장 구체적이고 복잡한 현실성, 즉 총체성(totality)의 관점에서 이전의 모든 서술 단계들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Arthur, 2004: 65~66). 특히 이 역행의 논리와 관련하여, 아서는 자본의 범주들의 서술 순서가 실제 역사적인 발전 단계와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역사 변증법(historical dialectics) 이론(논리역사주의)을 비판한다. 가령, 역사 변증법 이론가들은 자본의 맨 처음 등장하는 상품 범주가 상품생산이 일반화되었지만 아직 착취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자본주의가 아닌) 단순상품생산사회(simple commodity production)라고 주장하는데, 이와 달리 아서는 자본에서 다루고 있는 상품은 자본관계라는 총체성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하는 범주라고 반박한다. , 상품은 단순히 (등가)교환(C-M-C)의 결과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관계(M-C-M)의 한 계기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구체적이고 복잡하며 완전한 현실성으로서 [서술의] 끝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지지하고 보증하며,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논리적 배열(sequencing)을 역행적으로 정당화한다(Arthur, 2004: 65).

이와 같은 관점에서 아서는 마르크스의 자본의 서술 순서가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 ‘(생산적) 노동’(productive labour)의 범주가 지나치게 이르게 도입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두 상품의 교환관계를 제시한 이후, 서로 다른 사용가치가 교환될 수 있는 이유를 두 상품에 내포된 공통의 무언가’, 즉 추상노동에서 찾고 있다(Marx, 2008: 90). 그런데 아서는 추상노동의 도입은 가치형태가 충분히 발전하여 보다 복잡한 범주, 즉 총체성으로서 자본에 가서야 이루어질 때 변증법에 충실한 서술이라고 이해한다(Arthur, 2004: 101~106). 이에 따르면, 자본(자기증식하는 가치)은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치증식 과정을 내재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 잉여가치의 담지자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산적 노동 개념은 자본 범주의 출현 이후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real subsumption)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처럼 아서는 가치형태의 발전과정을 현실추상(real abstraction) 혹은 부재화의 변증법(dialectic of the absent)으로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 체계의 범주들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전체(whole)/총체성(totality)을 재구성하고 이전의 범주들을 이 재구성된 전체의 한 계기로서 이해하는 것이 체계 변증법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는 아서의 가치형태론의 말미, 즉 자본이 생산적 노동을 포섭함으로써 노동을 가치로 전화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서의 입장이 노동가치이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이 가치가 되는 과정을 무매개적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에서 가치가 생산되는 과정에 보다 엄밀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작동 메커니즘과 변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길을 터주기 때문이다.


 

노동은 어떻게 가치가 되는가?

 

상기하였듯이, 아서는 노동가치이론의 범주들을 자본관계의 내재적 계기로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추상노동, 가치, 착취와 같은 개념들을 자본관계 속에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회적 필요 노동(추상노동) 시간을 사회적 필요 착취 시간’(socially necessary exploitation time)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아서의 제안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요컨대 아서의 가치형태론 해석의 핵심은 추상노동이 자본 형태의 발전 결과로 형성된다는 데 있다. 이는 기존의 가치형태론이 추상노동의 형성을 교환에서 발생하는 구체노동의 균등화 결과로 파악하는 것과 달리 생산에서의 착취(계급투쟁) 과정에 이미 추상화메커니즘이 내재되어 있음을 함의한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편으로 아서는 자본가들이 노동을 ‘(잉여)가치의 원천으로서만 취급하는 데서 노동의 추상화 계기를 발견한다. , “노동이 자본관계 내에서 추상적이라고 적합하게 개념화되는 이유는 산업자본이 모든 노동들을 동일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것[산업자본]이 노동을 구체적 특수성과 상관없이 똑같이 착취하려는 관심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Arthur, 2004: 42).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 역시 노동을 임금의 원천으로서만 대하기 때문에 노동의 구체적인 특질과 방식이 사상된다. 그 결과 노동의 구체성이 추상화되게 된다. 아서는 기존의 루빈(I. Rubin)과 같은 가치형태론이 생산과정에서의 착취를 노동이 추상화되는 계기로서 적합하게 사고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는 분배과정에서의 착취가 아니라 생산과정에서의 착취를 적합하게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Arthur, 2004: 46). , 루빈의 가치형태론은 노동의 추상화 과정을 통해서 가치 개념이 상품 교환의 결과이면서 전제(생산과정에서 잠재적으로 규정되어 시장교환에서 실현된다)라는 점을 일면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서는 가치의 원천으로서 추상노동 개념을 자본관계 속 착취과정에서 노동이 추상적 총체성으로 구성된 결과라고 재규정한다.

그런데 가치형태론을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은 한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자본이 가치를 창조한다’”(Arthur, 2004: 41)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노동가치이론의 근본 가정이 (잉여)가치가 (착취한) 사회적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는 테제에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의 결과로 추상노동이 만들어진다는 아서의 해석이 마치 노동가치론을 폐기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 생산적인 것은 노동이 아니라 자본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아서는 여전히 자본이 생산적이라는 테제를 받아들이면서도 노동가치이론의 정합성을 유지할 있다고 주장한다. 아서는 이 논점을 나폴레오니 비판을 매개로 명료하게 가다듬는다.


1) 신변증법(New Dialectic)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변증법을 비목적론적 형태로 가공하고자 하는 이론적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은 헤겔의 논리학(Science of Logic)비형이상학적’(non-metaphysical)으로 독해하면서, 여기에 내재된 헤겔의 방법이 마르크스의 과학적 방법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토니 스미스(T. Smith), 프레드 모슬리(F. Moseley), 로버트 알브리튼(R. Albritton), 패트릭 머레이(P. Murray), 토마스 세키네(T. Sekine) 등이 신변증법의 이론 경향에 속한다.

2) 이 점에서 아서가 전통적인 헤겔주의의 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 아서는 인과성(causality)과 논리성(logicality)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아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 스스로는 자본주의 체계가 실제로 논리적 관계의 일부를 이룬다고 믿는다. 이는 내가 상품들의 이질성이 교환을 통해 추상화되는 방식을 강조하고 그것들[상품]을 보편, 즉 가치의 예화(instances)로 다루기 때문이다”(Arthur, 200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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