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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를 줍다>> - 박희성 등록일 2023.11.02 19:08
글쓴이 관리자 조회 68

이야기는 버려지는 것들로부터 길어올려진다. 한 사람이 버리는 쓰레기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의 이야기를 길어낼 수 있다. 영수증이나 식료품 포장지와 같은 쓰레기들은 일상의 궤적을 그려 보여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더 내밀한 이야기까지 알아낼 수도 있다. 쓰레기는 '버리는 것'인만큼, 내 인생에 더 이상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것, 내보내고 싶은 것, 쓰레기 봉지에 넣어 꼭꼭 묶어 보이지 않게 배출하고 싶은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버린다고 해서 없던 것이 될 수 있을까. 쓰레기에 대한 지수의 관심은 두 가지 기억에서 출발한다. 둘 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다. 첫째로는 급하게 버린 쓰레기에 분리배출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관리사무소에 불려간 일이다. 내가 이미 내버린 것을, 심지어 브래지어 따위까지 낱낱이 진열된 앞에서 핀잔을 듣는 일이란 당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다. 아예 없던 일로 하고픈 비밀을 들킨 것처럼 말이다.

 또 하나의 더 오래된 기억은 사무실 쓰레기통에서 나온 콘돔으로부터 전 애인인 작가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지수가 버렸던 브래지어는 전 애인이 선물했던 것이기에 그 브래지어의 귀환은 더 충격적인 사건이 된다. 남기고 드러낼 것과 버리고 숨길 것을 가르는 쓰레기봉지라는 얇은 막이 찢어질 때 진실이 나타난다. 그래서 지수는 그 봉지 안을 의심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우재의 쓰레기봉지는 지수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우재의 쓰레기봉지 안은 깨끗하다. 대부분은 대단히 추악한 것까진 아니라도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것이 쓰레기에 들어있기 마련이다. 다른 이웃들의 쓰레기엔 불륜의 증거인 모텔 영수증이나, 남루한 생활을 보여주는 무수한 냉동식품 봉지나 소주 뚜껑 따위가 섞여 있다. 하지만 우재의 쓰레기는 깨끗하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쓰레기봉지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우재는 그런 사람, 마음의 쓰레기통까지도 깨끗한 사람인 것일까? 사실 영화를 초중반까지는 좀 당황스러웠던 게, 지수가 쓰레기로부터 얻은 정보를 이용해 가장하는 수많은 우연과 접점에도 우재가 전혀 미심쩍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알고 내가 드나드는 바와 영화관에 오며, 같은 종의 물고기를 키우고, 내가 마시는 차에 대해 알고 있지? 의심하거나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 지수가 종종 챙겨주곤 하는 이웃집 아이가 자기 집안사정을 줄줄 꿰는 지수에게 화를 내듯이. 그런데 우재는 그러지 않는다. 우재는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자, '쓰레기통이 깨끗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이는 표면을 믿는 우재와 쓰레기통이라는 심층을 뒤지는 지수라는 대립이 만들어진다. 지수가 이웃들의 쓰레기통을 분석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 우재는 지수가 보이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주지 않은 것에 분개한다. 이 클라이맥스 장면에서의 대사들은 두 사람의 도식적 대립을 잘 드러낸다. 일부 대사는 사실성보다는 대립을 보여주는 데에 치중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만큼 이 영화에서 두 성격의 대비는 인물 간의 관계를 쌓아나가는 데에 중심이 된다. 지수가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았거나, 우재가 지수를 한번이라도 의심했다면 둘은 가까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둘을 가까워지게 했던 상반되는 태도는 전말이 드러났을 때 둘을 멀어지게 만들어버린다. 둘이 다시 가까워지게 되는 것은 우재가 자신의 '마음의 쓰레기통'을 다시 발견했을 때이다. 우재는 어머니의 부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의심하지 않고 표면만 보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태도는 마음의 쓰레기를 더 깊은 곳에, 더 두꺼운 봉지 안에 버리는 일이다. 실제의 쓰레기통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그 안에 있었다. 아무리 꽁꽁 묶어 깊은 곳에 버리고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해도, 쓰레기는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쓰레기라는 소재는 일상적이면서도 충격적이다. 당연히, '버리는 것'이기에 쓰레기는 다시 돌아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수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데에는 악의는커녕 이웃들을 향한 다정함까지 깃들어있는 것 같지만, 수사물의 형사라도 된 양 화이트보드에 각 호의 쓰레기 사진을 붙이고 문서로 정리하는 지수의 모습이 어딘가 섬뜩한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아파트라는 일상적 배경과 사랑을 쌓아가는 젊은이들의 소소한 모습을 보여줌에도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이유이다. 지수와 우재가 친밀해질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해질수록 관객의 마음은 언제 이 비밀이 터질지 몰라 불안해진다. 영화 내내 화면은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다. 아파트의 외관은 규칙적이고, 지수가 쓰레기를 뒤지는 모습도 위생적이고 질서정연한 연구 프로젝트처럼 묘사된다. 영화는 그 질서정연함의 틈새에서 은폐된 불안정을 길어올려, 이야기로 쌓아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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